‘유지환’ 9회 개인전

기사입력 2021.05.14 16:31 조회수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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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 할 수 있는 전위예술가 ‘유지환’의 9회 개인전이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M'에서 5월 19일 부터 25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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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년간의 ‘현대인’을 주제로 한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전시된다.

작가는 회화작품활동은 물론 퍼포먼스 작업을 겸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조각작품에 이르기 까지 현대예술의 전방위에 걸처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개인전에는 지난 몇년가 아트페어에서 전시되었던 작품들을 포함해서 디아섹으로 만든 작품, 입체작품 등과 함께 올해 3월 문래창작촌으로 작업실을 옮긴 후의 신작들을 포함  30여점이 전시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작품 뿐만아니라 조각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더욱 주목이 된다. 

 

 

* 전시명 :  ‘유지환’ 9회 개인전

* 주   관 : 갤러리M 

* 기   간 : 2021년 5월 19일 ~ 25일  ( 12:00 ~ 18:00 )  

* 장   소 : 갤러리M  서울 종로구 인사동4길 12

* e -mail :  currere@naver.com    

 

 

한말, 달리자

Horse in Fantasy

- 제 9 회 유지환 개인전 -



# 들어가기 전, 에피소드 하나


말, 달리자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를 우선적으로 하려고 한다.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필자의 경우, 대학 및 석사, 박사까지 미술을 전공하며 친구들 뿐 아니라 선후배, 지인들까지 대부분이 미술을 전공한 예술가들이다. 그런데 예고를 졸업한 동기 중에 한 명이 다른 친구들은 모두 미대에 진학할 때 대학입시에 실패하며 곧바로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있다. 우리는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몇몇이 종종 만났으며 대학을 졸업하여 각자의 길을 가게 된 후에도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물론 직장인 그 친구를 빼고는 다들 어설픈 신진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인가 우리는 또 모임을 가졌고 우리의 직장인 친구는 퇴근 후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으로 헐레벌떡 합류했다. 술자리 후에 노래방을 갔는데, 구석에서 조용히 탬버린을 두들기며 친구들 노래에 장단만 맞춰 주던 그 직장인 친구가 갑자기 “너희가 넥타이들(샐러리맨)의 비애를 알아?!!!”라며 벌떡 일어서서 목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러 머리에 질끈 매고는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를 온 몸을 흔들며 신명나게 부르던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직장인의 비애’라니……‘ 그 때에 평범하면서도 나와는 먼 세상처럼 생각되어 왔던 ‘직장인’이라는 단어가 필자에게 갑자기 놀랍고 생소하면서도 순간적으로 피부에 접촉하는 듯한 생생함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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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유지환의 ‘말’


‘말’이라는 소재는 유지환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부터 등장했다. 그 때는 얼룩말이었다. 

그 이후 여러 전시를 거쳐 8회 개인전 ‘모던 트로이안 홀스’와 이번 9회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말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애초에 행위예술을 오래 해 왔고 그 이후 회화 작업을 병행하며 장르를 넘나들기 시작하더니 작금의 작업은 ‘말’이 주요 소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또 다시 드는 의문, 왜 ‘말’인가


필자는 유지환 작가의 제1회 개인전인 <Pay Attention to the Picture>와 제4회 개인전 <쑈쑈쑈>의 전시서문을 썼다. 이제 9회에 이르러 또 다시 유지환 작가는 나에게 고통(?)의 숙제를 안겼다.

1회 개인전에서 전시서문을 쓸 때에는 앞서 작업실을 방문했고, 행위예술을 오래 하던 친구가 갑자기 왜 회화 전시를 하겠다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전시서문의 부침에 앞서 보낸 자료를 보니 단지 형식만 다를 뿐 일관된 주제를 이끌어 가는 것에 흔쾌히 글을 쓴 기억이 난다. 그리고 4회 개인전에도 전시서문을 부탁 받았었고, 그 때의 유지환 작가의 관심과 입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현상을 집어내며 나름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모습이었다. 자본주의에 종속된 보편자들과, 진실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엉뚱한 스펙터클이 되는 ‘쑈’를 그들 바깥에서 관찰하고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객관자! 객관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진짜 모습을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야말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지환은 넥타이를 매고 정시에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진정성을 뒤로 한 채 절박한 사안을 엉뚱한 쑈로 만들어버리는 정치인도 아니다. 그는 예술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유지환 작가가 말을 멋들어지게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인가부터 사람도, 청와대도, 태디베어도 사라지고 ‘말’만 그린다. 이제 9회 개인전 서문을 다시 맡게 되면서 또 의문이 생겼다. ‘왜 ’말‘인가?’

그의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찾아 훑어보았다. 1회 개인전을 위해 보내온 자료부터 그 사이 전시 자료, 이번에 보내 온 자료까지.

‘설마 이젠 그도 지쳤나? 이젠 비판이고 뭐고 탐미주의자가 되기로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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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ent of Roundabout 80x40cm Acrylic on Canvas-Crystal Resin finish 2019

 

사회적 객관자


유지환의 ‘말’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흔히 아는 ‘말’, 자주 접하는 ‘말의 이미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말은 인간에게 길들여진 여느 가축들처럼 태초에는 초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존재였다. 언젠가부터 여타 가축들처럼 말도 사람들에게 길들여지며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데 유용해졌다. 그런데 이 ‘말’이라는 동물은 다른 길들여진 동물들과는 좀 다르다. 보통 식량의 확보, 사냥이나 농사의 효율성, 다른 맹수 혹은 해로운 동물들로부터의 방어용, 요즘의 애완동물 등등의 용도와는 다르게 ‘말’은 탁월한 전쟁 수행용으로 활용이 가능했다. 현대적 무기가 등장하기 전에 기마부대의 유무와 크기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제국의 유럽정복은 탁월한 전쟁수행 능력을 가진 기마부대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만큼 힘이 있고 민첩하며 지능이 높은 동물, 그러면서도 인간과 교감하고 인간에 순종하는 동물이 말인 것이다. 말은 오래 전부터 동물계의 귀족이었고 권력에 종속된 동물이었다. 또한 외모도 아름다웠다. 그만큼 귀하신 몸이었기에 신화에도 등장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도 덧붙여지게 된 것이다. (트로이 목마, 유니콘, 페가수스, 어린이의 목마와 놀이동산의 회전목마 등등) 야생에서는 거칠고, 화가 나면 무시무시한 뒷발질도 서슴지 않지만 반대로 인간과 정서적으로 교감이 가능하고 유순하며 부지런한 것이 또한 말의 이미지인 것이다. 인간이 몰아가는 대로 순순히 달려주는 말의 이미지는 자본에 길들여지는 넥타이부대에 오버랩 시킬 수 있다. 이것이 유지환 작가가 초창기 전시에서 말의 이미지를 작품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이다.

말 중에서도 얼룩말은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매력적이지만 인간에게는 활용적 가치가 떨어진다. 초기 유지환 작가의 작품에서 길들여지지 않아 초원을 자유롭게 달려야 할 말이 오히려 어떤 공간 속에 갇혀 초원을 바라보는 모습이 있다. 그 때에 유지환 작가는 특수성을 상실한 보편적 인간형인 넥타이부대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제작된 여러 이미지 소재 중 등장한 말은 필자에게는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이고 적막해 보였다. <쑈쑈쑈>에 등장한 말은 또 다르다. 권력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향해 힘껏 뒷발질을 한다. 필자는 통쾌함을 느꼈다. 객관자 유지환은 ‘너희가 샐러리맨의 비애를 알아?’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지금 너희, 샐러리맨(혹은 보편자인 샐러리맨을 통제하는 권력)의 모습이야!’라고 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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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A White Horse in the Orange Dream_80x80_2018

 

다 아는 이야기는 이만큼 요약하고, 이제부터는 왜 ‘말’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자.


사회적 객관자에서 행동의 주체자로


애초에 유지환 작가에게 말은 주제에 부합하는 소재로서, 일종의 표현의 방식일 뿐이었다. 초원을 그리워하는 얼룩말로, 한 방 멋들어지게 날리는 말로……. 그런데 작금의 말은 그저 달린다. 이전의 한 전시에서 한 평론가가 물었다. 왜 말이냐고. 유지환 작가는 작품에 오랫동안 말이 등장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답한 구절이 있다. 그저 소재가 주제에 잘 맞았고, 말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들어서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고. 그러다 보니 왠지 모르게 ‘나(유지환)’의 이미지와 잘 맞는 것 같다고.

당황스러웠다. 여러 자료를 아무리 살펴봐도 뭔가 ‘이거다!’ 싶은 구절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저 체화된 ‘나’라고나 할까...”라는 말이 조금은 공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며칠을 고민했다. ‘체화된 나’, ‘달리는 말’,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건 너무 흔하고도 뻔한 표현이 아닌가. 고민 끝에 통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도대체 유지환 작가에게 ‘말’이란 무엇인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가 답했다. “그게 바로, 그냥 '나‘야. 말과 일체화가 됐다고나 할까”


“……”


그렇다. 그가 ‘말’이 되었다. 달리는 말이.


직장인 자신이 아니라, 권력 자체가 아니라, 그 울타리 밖에서 날 선 비판을 하고 그들의 모습을 일깨워주던 객관자 유지환이 그의 가족에게는 어느 샌가 순종하며 묵묵히 달리는 말, 아티스트로서 활동하며 근면 성실하게 살아온 말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나(유지환)’이다. 묵묵히 달려온 말, 그러나 드넓은 초원을 자유롭게 질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말.

그는 이렇게 새로운 모습의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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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antastic Moment of an Abyss_80x80_2019

 

마주 하기에는 견딜 수 없는 ‘실재’, 우리는 ‘환상’ 속에서 위로 받는다.


이 즈음에서 정신분석학자인 라깡의 ‘실재’와 ‘환상’의 개념은 유지환의 ‘환상 속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훨씬 복잡하지만 이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실재와 진실은 쉽게 혼동할 수 있지만 실재는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실재는 진실을 가린다. 실재는 마주 할 수 없다. 마주하기에는 견딜 수 없는 트라우마이며 너무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지환의 실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유지환에게 실재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본과 권력의 통제, 특수성을 제거한 보편성의 강요가 아닐까. 그것이 우리 삶의 실재라는 것은 받아들이기에 끔찍하다. 그래서 그 끔찍한 실재 대신 우리에게 드러났던 것은 근면한 샐러리맨, 보편을 가장한 소통, 소비의 미덕이라는 실재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나마 상징은 견딜만한 것이다. 그 동안 유지환 작가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외쳐왔던 것이 이 끔찍한 실재를 직접 대면함으로써 그것이 가리고 있던 진실이 무엇이지를 보라는 것이었다. 실재에 가려진 그 진실은 무엇인가? 자신만의 특수성과 자율성이 유지환이 그토록 보여주기를 원했던 진실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게 해서 그들은 진실로 돌아갔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실재에 의해 끊임없이 실패하기 때문이다. 단지 조우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 끔찍한 실재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가. 불가능한 진실은 우리의 욕망이 되었다. 욕망의 근본적인 성격은 끊임없이 실현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실패하고 좌절한다. 그래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욕망인 것이다. 그러나 아주 완전히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상상을 통해 욕망을 상연하는 무대가 바로 ‘환상’이다. 욕망의 황홀한 상연(실현이 아니다)인 환상은 끔찍한 실재에 대한 방어가 된다.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위안이 되지 않을까.


어느 덧 우리는 50을 넘어선 중년이 되었다. 아이들은 장성해 가고 삶이 무엇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예술가라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 세월이다. 그 세월을 지나오며 그는 세상의 외부자(관찰자이자 객관자)이면서도 내부자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자식이고 아버지, 남편이며 책임 있는 한 사회인인 것이다. 바깥에서 관찰하고 비판하는 객관자였던 유지환은 세월이 쌓아 놓은 더미 위에서 세상에 순종하는 수많은 말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태초에 그 누구에게도 더렵혀지지 않았던 초원에서 마음껏 질주하던 그들처럼 달리는 말, 행동하는 주체자로서.


작가 유지환이 말한다.


“자, 우리 이제! 말,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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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some moment_white horse_01_72.6-72.6cm

 


# 나오며


“말이 곧 나야!”


그의 말에 ‘말’의 이미지와 필자가 오랫동안 보아왔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다부지고 튼튼한 몸, 지치지 않는 활력과 근면함, 성실함. 새로움을 향한 끊임없는 질주. 그래, 말이구나.

또 다시 새로운 장르를 실험한다. 이번엔 입체작업을 더했다, 

그 황홀하고도 환상적인 말의 질주하는 모습. 유지환은 그 순간을 붙잡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레진으로 순간을 고정시켜버렸다고. 예술가로서 솔직하고 순박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목에 대해 전화 통화로 그에게 말했다.

“말 달리자 밖에 생각이 안 나”

그러자 그가 나의 ‘아름다운 두뇌를 믿는다’고 했다.

하여간, 말재간도 좋아.


나도 유지환 작가를 따라 달려봐야겠다.


2021 작업실에서

미술학 박사   이승신 씀

 

[성백 기자 openarts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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